신라 신문왕의 업적
신라는 문무왕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피리를 불면 공격하던 적의 병사들이 물러가고, 험한 파도도 잠재우며,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는 신비스러운 힘을 가진 <만파식적>을 만들게 했다고도 전해지는 신문왕은 어떻게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루었을까?
목차
- 왕권 강화
- 녹읍의 폐지
- 집사부의 강화
- 국학설립
- 9주 5소경의 행정구역
- 군사제도 9서당 10정
1. 왕권 강화
아버지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은 즉위 후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이 권력을 차지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이 반란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모두 죽여서 왕의 권력을 강하게 굳혔다. 이것을 본 신하들은 왕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2. 녹읍을 폐지
녹읍은 나라가 관리들에게 일을 한 대가로 지급하는 논밭을 말한다. 신문왕은 이 녹읍을 폐지했는데, 녹읍 대신 관료전이나 곡식으로 지급했다. 이것도 귀족들의 경제적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3. 집사부 강화
신라에는 고구려, 백제와 다른 <화백회의>가 있다. 화백회의는 귀족들이 중요한 일들을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제도이다. 신라의 최고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일을 왕도 존중하고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신문왕은 화백회의와 이 회의를 이끄는 상대등의 권한을 줄였다. 대신 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명령을 받는 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을 높였는데, 이것도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이었다.
4. 국학 설립
신문왕은 또 국학을 설립해 유학을 장려했다.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학 출신의 6두품 이하 인재들을 등용해서 왕을 보위하는 세력으로 키우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5. 9주5소경의 행정구역
통일 후에 영토가 넓어진 신라는 영토와 늘어난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도를 정비해야 했다. 그래서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한 것인데, 전국을 9개의 주로 나누고, 5개의 작은 도읍을 두었다. 그리고 5소경에는 경주에 살던 왕족과 일부 귀족들을 옮겨와 살게 했다.
6. 군사제도 9서당 10정
신문왕은 군사제도도 새롭게 정비했다. 왕궁과 수도를 지키는 군대인 9서당과 각 주와 국경을 지키는 10정을 두어서 국방을 강화했다. 군대에는 신라인들을 비롯해서 고구려, 백제, 말갈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는데, 출신을 가리지 않고 통일신라의 백성으로 화합하기를 바랐던 신문왕의 뜻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신문왕은 강한 추진력으로 왕권을 강화해서 경덕왕에 이르기까지 통일된 신라가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기틀을 확실하게 잡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면서 왕권은 다시 약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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