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을 있게 한 퇴계 이황과 그의 라이벌
이황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로 연산군이 재위 중인 시기 안동에서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을 거쳐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초기까지 조선과 함께 했다. 8남매의 막내인 이황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하기와 공부를 좋아해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지는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다. 하지만 너무 학문에 몰두하는 바람에 건강을 해쳐 성인이 된 이후 자주 병치레를 했다.
4번의 과거를 보고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지만, 을사사화 이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서 지낸다. 이때 토계에서 따와 '퇴계'라는 호를 만들게 되었다.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한 이황은 어떻게 지냈을까?
목차
- 소수서원을 있게 한 이황
- 이황의 라이벌 남명 조식
1. 소수서원을 있게 한 이황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성리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설립하고 사당의 동쪽에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런데 이 백운동서원이 나라로부터 인정받고 알려지기 시작한 데는 퇴계 이황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원하는 글을 써 나라로부터의 지원을 요청했고, 명종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소수'는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의미로 소수서원은 이렇게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2. 이황의 라이벌 남명 조식
남명 조식은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난 조선중기의 학자이다. 퇴계 이황과 같이 학문에 몰두하는 일에 행복을 느끼고, 매화를 사랑했던 조식은 조선시대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남명 조식도 이황과 함께 사화를 겪게 되는데, 19세에 기묘사화로 친척들이 죽는다. 남명 조식은 벼슬에 대한 욕심이 없어 학문에 전념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품으로 제자들에게도 "경(敬)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실천하라"라고 가르쳤다. 남명 조식을 따르는 제자들도 퇴계 이황을 따르는 제자들도 한데 모여 동인을 이루지만, 후에 남명의 제자들은 남인, 이황의 제자들은 북인이 된다. 조식의 사상을 이어받은 학파에는 곽재우와 정인홍 등 많은 인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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