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
- 일 오후 9:40 (2013-10-26~)
- 출연
- 최원정, 이시원, 허준, 최태성, 이해영, 이다지, 신병주, 원동연, 임윤선, 류근, 심용환, 이윤석, 정병준, 박태균, 다니엘 린데만, 박상영, 유동훈
- 채널
- KBS1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_10.26 사건의 전말
10.26사건은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의 음모라는 설, 김재규의 우발 살인이라는 설 등 여러가지 원인들이 이야기 되어지고 있다. 또 김재규가 직접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변이었다는 설도 있다.
목차
- 미궁으로 남은 범행동기
- 김재규가 '내란목적살인죄'여야 했던 이유
- 소수의견과 사형집행
1. 미궁으로 남은 범행동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총성이 울려퍼진다. 피살된 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다. 현정사상 유일한 국가원수의 시해 사건이었다. 범인은 바로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합동수사본부는 내란목적살인을 결론을 내렸지만,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범행동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김재규는 왜 대통령 피살을 결심한 것일까?
육영수 여사의 피격사건 이후에 대통령의 경호가 강화되면서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 후 무술실력을 갖추고, 5.16 정변에 참여한 차지철이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오른팔로 떠올랐다. 차지철은 박정희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서 권력을 쌓아서 자신의 계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가는 모든 문서를 자신을 통해서 가도록 했는데, 이 문제로 중앙정보부의 김재규와 부딪치기 시작했다. 특히 부마항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내려간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하는데, 차지철과의 대립으로 묵살되었다.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를 차지철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이다.
2. 김재규가 '내란목적살인죄"여야 했던 이유
사건 직후 김재규는 정승화와 같이 차를 타고 와서 육본을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이 함께 꾸민 일로 여겨졌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은 시해현장 부근에 정승화가 김재규의 초대로 와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재규가 단독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합동수사본부 수사관들은 정승화와 김계원을 의심했다.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7시간 지난 시점이었다.
시간이 흐른 후 전두환의 증언에 따르면 이학봉 중령의 대통령 시해 사건 후 육군총장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대통령의 시신 수습과 범인 색출을 한 적이 없으며 청와대 포위를 포위시켰으나 그 이유를 모른다는 보고를 받고 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며, 정승화를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 또 다른 내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체포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전두환은 정승화를 김재규에게 동조했다는 이유로 내란방조죄로 체포시키고 최규하를 하야시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3. 소수의견과 사형집행
1980년 5월 20일 피고인 김재규의 상고는 모두 기각되고 1심과 동일한 형량인 사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판사들 중 6명의 대법관이 소수의견을 냈지만, 비상계엄 아래 그들의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4일만에 김재규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유신체제는 무너졌지만, 이후 하나회를 발판으로 한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을 거쳐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또 다른 독재 정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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