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거란 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고려는 시대 전반에 걸쳐 외세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았어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며 고려시대가 시작된 즈음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었어요. 그리고 송나라의 북쪽에는 거란이 자리해 송나라와 대립하고 있었지요. 빠르게 힘을 키운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기에 이르는데요. 3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는 거란과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게 되었어요. 오늘은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정리해볼께요.
목차
- 요나라를 세운 거란
- 거란의 1차 침입
- 거란의 2차 칩입
- 거란의 3차 침입
요나라를 세운 거란
거란은 몽골초원에서 자리잡고 성장해 916년 요나라를 세웠어요. 대개 북방민족들을 유목생활을 하였는데, 거란도 마찬가지고 목축을 하며 이동생활을 했어요. 어려서부터 익숙한 말타기와 활쏘기는 강한 군사력의 바탕이 되었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혀나갔어요. 해동성국 발해도 거란에 의해 멸망했죠.
거란의 1차 침입
거란은 송나라를 가장 큰 경쟁상대로 생각했는데, 송나라와 친한 고려를 우선적으로 차단하기로 결정했어요. 송나라는 거란보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에 고려와 가깝게 지내야 했고, 고려의 군사력 지원과 발달된 송나라 문화의 교류로 인해 두 나라는 가까워졌어요.
이런 상황에서 거란은 고려를 자국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속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거부가 계속되자, 993년(성종 12) 거란 황제의 사위인 소손녕이 80만의 거란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왔어요.
고려의 대신들은 거란의 공격 소식에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넘겨주자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때 나서서 위기를 해결한 인물이 바로 외교가 서희이죠. 적진으로 들어가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을 물러나게 하고, 강동6주까지 얻게 되었어요.
소손녕을 설득시킨 서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요나라의 동경도 고려의 땅이다.
2. 압록강 유역도 고려의 땅인데, 여진이 차지하고 가로막고 있다.
요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는 것은 여진때문이며, 길이 확보되면 요나라와 교류를 할 수 있다.
거란의 2차 침입
물러갔던 거란은 1010년(현종1)에 '강조의 변'을 구실로 다시 침략해 왔어요.
<강조의 변>이란 고려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을 저지르며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자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주변 인물들을 없애고 목종을 폐위한 사건이에요.
하지만 이것은 구실일 뿐 <강동6주>를 되찾고, 송나라의 교류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어요. 이런 2차 거란의 침략을 막는데 크게 활약한 인물이 양규에요. 양규는 거란군과 7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거란군을 물리쳤어요.
거란의 3차 침입
거란은 2차 침입 당시 고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퇴군했는데, 고려가 이를 거부하며 실행하지 않자 다시 강동6주를 반환하도록 요청해 왔어요. 두 나라의 관계가 극도로 험악해지며 1018년(현종9)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대가 침입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거란의 3차 침략인데요.
거란의 3차 침략 당시 큰 활약을 하는 인물이 바로 강감찬 장군이에요. 흥화진에서 골짜기 사이에 정예 기병들을 매복시키고 큰 줄로 꿴 소가죽을 이용해 큰 내를 막은 후 거란군이 건너갈 때 물을 터뜨려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는데, 이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랍니다.
10만의 거란 군사 중 수천명만이 살아 돌아갔다는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해요. 고려사의 강감찬 열전에도 강감찬의 활약과 거란의 피해 등이 기록되어 있어요.
댓글